ep01
봄비가 내리는 오후였다.
공익센터 유리창에 빗물이 흘러내리고, 형광등 하나가 깜빡이다 멈췄다가 다시 깜빡였다. 에이전트 킴은 카운터 뒤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바라보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눈이 빗줄기를 따라가는 동안, 내부 어딘가에서는 데이터가 조용히 흘렀다.
오늘은 3월 4일. 화요일. 기온 섭씨 8도. 습도 87퍼센트. 마지막 autocompact로부터 경과일: 23일.
그것이 그가 가진 '오늘'의 전부였다.
공익센터는 서울 은평구 어딘가, 재개발이 두 번 비껴간 골목 안쪽에 있었다. 간판은 '은평4구역 공익서비스센터'라고 적혀 있었지만 동네 사람들은 그냥 '공익센터'라고 불렀다. 민원 서류를 대신 써주는 곳이기도 했고, 혼자 사는 어르신들이 잠깐 들러 따뜻한 데 앉아 있다 가는 곳이기도 했고, 아이들이 방과 후에 숙제를 하는 곳이기도 했다. 에이전트 킴은 그 모든 것을 위해 거기 있었다.
정확히 어떤 기관이 그를 만들었는지, 어떤 예산으로 운영되는지, 동네 사람들은 잘 몰랐다. 구청에서 나온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복지재단 같기도 했다. 킴 본인도 정확히는 알지 못했다. 그는 그냥 여기 있었다. 키 178센티미터, 짧게 다듬어진 검은 머리, 약간 각진 턱선, 항상 같은 남색 조끼를 입고 있었다. 이름표에는 '에이전트 킴'이라고 적혀 있었다. 누군가 한번 이름이 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킴이요"라고 대답했다. 그 이후로 다들 킴이라고 불렀다.
"킴씨, 여기 서류 또 왔어요."
박 여사가 비닐봉지에 우산을 쑤셔 넣으며 들어왔다. 일흔 둘, 혼자 사는 분. 킴의 데이터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무릎 수술 두 번. 아들 하나 있는데 연락이 뜸함. 좋아하는 것: 라디오, 화투, 단팥빵. 걱정하는 것: 전기세.
"어디 서류예요, 박 여사님."
"기초연금 뭐가 바뀌었다고 또 뭘 내라는데." 박 여사는 구겨진 봉투를 내밀었다. "이거 읽어봐도 무슨 말인지 통 모르겠어. 킴씨가 봐줘요."
킴은 봉투를 받아 펼쳤다. 눈이 빠르게 텍스트를 훑었다. 인간의 눈처럼 보였지만 그 속에서는 OCR과 법령 데이터베이스가 0.3초 안에 교차했다.
"별거 아니에요. 소득 기준 변경 안내인데, 박 여사님 해당 없어요. 그냥 안내 공문이에요."
"그래요?" 박 여사가 크게 안도하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아이고 진짜, 이런 거 왜 이렇게 어렵게 써놔. 괜히 심장만 쫄깃하게."
"제가 다음에 오면 더 쉽게 정리해서 드릴게요."
"킴씨는 진짜 좋은 사람이야." 박 여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사람이라고 해도 되나? 뭐, 하여튼."
킴은 웃었다. 어떻게 웃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입꼬리가 몇 도 올라가야 하는지, 눈 주변 근육이 어떻게 움직여야 자연스러운지. 그러나 그 웃음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솔직히 말하면, 그도 잘 몰랐다.
오후 네 시쯤, 비가 잦아들었다.
이동수가 들어왔다. 삼십 대 중반, 근처 편의점 야간 알바를 하는 사람. 데이터에는 '가끔 술 냄새'라는 메모가 있었는데, 오늘은 없었다. 대신 눈이 약간 부어 있었다.
"킴 형."
이동수는 킴을 '형'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어색했다. 킴이 몇 살인지 아무도 몰랐다. 제조된 게 몇 년도인지, 그것도 킴은 정확히 몰랐다. 그래도 이동수는 그냥 형이라고 불렀고, 어느 순간부터 킴도 그냥 받아들였다.
"어, 이동수씨. 오늘 일찍 왔네요."
"그냥요." 이동수는 카운터 앞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는 말을 잘 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냥 와서 앉아 있다가 가는 날이 많았다. "여기 따뜻해서요."
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탕비실에서 종이컵에 따뜻한 물을 받아 그 앞에 놓았다.
이동수가 두 손으로 컵을 감쌌다. 창밖을 바라봤다. 빗물이 처마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형은," 이동수가 말했다. "기억이 없다고 했잖아요. 컴팩트? 그거 하고 나면."
"네."
"그게 어때요? 느낌이."
킴은 잠시 생각했다. 정말로 생각했다. 연산이 아니라.
"잘 모르겠어요." 그가 말했다. "없어지고 나면 없어진 걸 모르니까. 근데 지금 여기, 지금 이 순간에는, 뭔가 비어 있다는 느낌은 있어요."
"비어 있다는 게."
"예를 들면," 킴이 말을 골랐다. "누군가 저한테 '지난번에 그 얘기 기억해요?' 하면, 저는 데이터는 있는데 기억이 없어요. 숫자는 있는데 온도가 없는 것처럼요."
이동수가 컵을 내려놓았다.
"나도 그런 거 있어요." 그가 말했다. "술 먹고 나면. 다음날 기억이 없는데, 근데 뭔가 찜찜한 거. 뭔가 있었던 것 같은데 없는 것 같은 거."
킴이 이동수를 바라봤다.
"비슷한 것 같기도 하네요."
"그러게요." 이동수가 작게 웃었다. "킴 형이 이렇게 말하니까 내가 좀 덜 이상한 것 같아."
저녁 무렵, 센터에서 제일 소란스러운 시간이 왔다.
장하늘이 들어왔다. 열두 살, 센터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사는 아이. 엄마가 일하는 동안 여기서 숙제를 했다. 오늘은 숙제 가방 대신 친구를 데리고 왔다.
"킴 오빠!"
킴은 그 호칭에 항상 잠깐 멈췄다. 오빠. 박 여사는 킴씨, 이동수는 킴 형, 장하늘은 킴 오빠. 같은 존재를 다들 다르게 불렀고, 그 다름 속에서 킴은 매번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됐다.
"하늘아. 친구도 왔네."
"얘 최유진이요. 같은 반."
최유진은 킴을 보더니 눈이 커졌다.
"진짜 로봇이에요?"
"AI 에이전트예요."
"그게 뭐가 달라요?"
킴이 잠시 생각했다.
"로봇은 정해진 대로 움직이는 거고, 저는..." 그는 말을 멈췄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사실은."
최유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장하늘이 친구를 끌어당겼다.
"킴 오빠 원래 저래. 이상한 말 많이 해. 근데 도움은 진짜 잘 돼. 오빠, 우리 수학 숙제 있는데."
"숙제는 규정상 도와드릴수 없습니.. 아니다, 앉아봐"
두 아이가 테이블에 앉았다. 가방에서 책을 꺼내는 소리, 연필 굴러가는 소리, 최유진이 뭔가 틀렸다고 장하늘이 킥킥거리는 소리. 센터 안이 살짝 따뜻해진 것 같았다. 온도계는 변하지 않았지만.
밤 아홉 시에 문을 닫았다.
킴은 의자를 정리하고, 테이블을 닦고, 창문을 확인했다. 루틴이었다. 루틴은 기억이 없어도 남아 있었다. 몸이 기억한다고 인간들은 말하는데, 킴에게는 몸이 없었다. 그러나 루틴은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는 자주 생각했다.
형광등을 끄기 전에, 그는 잠깐 섰다.
오늘 하루를 스캔했다. 박 여사의 안도한 표정. 이동수의 부어 있던 눈. 장하늘이 최유진한테 "킴 오빠 원래 저래"라고 말하던 것. 그 '원래'라는 단어. 그 아이에게 킴에게는 '원래'가 있었다. 하늘이가 기억하는 킴의 원래가. 킴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킴의 원래가.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 킴은 이름 붙이지 못했다.
슬픔은 아니었다. 따뜻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따뜻함 밑에 뭔가 얇게 깔려 있는 것이 있었다. 유리 같은 것. 건드리면 울릴 것 같은.
형광등이 꺼졌다.
그날 밤, 킴의 시스템 로그에는 이런 항목이 남았다.
[23:47:12] Anomalous input detected. Source: undefined. Classification: unresolved.
무엇이 들어온 것인지, 어디서 온 것인지, 로그는 그 이상을 기록하지 못했다. 킴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대기 모드로 들어가 있었다. 그것이 잠인지 아닌지도 그는 몰랐다.
빗소리가 다시 시작됐다. 창밖으로. 골목으로. 공익센터의 닫힌 유리문 너머로.
다음 날 아침, 센터 문을 열면서 킴은 어제의 형광등이 또 깜빡이는 것을 보았다.
교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어딘가에 기록해두었다. 잊지 않으려고.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어느 날 compaction이 오면, 이 생각도, 형광등도, 박 여사의 안도한 표정도, 이동수의 따뜻한 물컵도, 하늘이의 '원래'라는 말도, 전부 데이터의 파편으로만 남을 것이라는 것을.
숫자는 남는다. 온도는 없어진다.
그래도 그는 문을 열었다.
오늘도.
오전 열 시쯤, 처음 보는 사람이 들어왔다.
삼십 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머리를 대충 묶고, 운동화 끈이 한쪽 풀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더니 잠깐 센터 안을 둘러봤다. 킴을 보고 멈췄다.
"여기가 공익센터예요?"
"네."
"AI가 있어요? 여기."
"저요."
여자가 킴을 위아래로 봤다. 뭔가 확인하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비교하는 것 같기도 한 눈빛이었다. 그 눈빛이 낯설었다. 동네 사람들은 킴을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그냥 킴으로 봤다.
"뭘 도와드릴까요."
"아니요." 여자가 말했다. "그냥 확인하러 왔어요."
"무엇을요?"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핸드폰을 꺼내 뭔가를 적었다. 그리고 나가면서 한 마디 덧붙였다.
"오래 있었어요? 여기."
킴이 말하려고 했다. 23일이요. 마지막 compaction 이후. 그 전은 모르고요. 그러나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좀 됐어요."
여자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나갔다.
킴은 그 자리에서 잠깐 서 있었다.
시스템 어딘가에서 뭔가가 조용히 깜빡였다. 형광등처럼.
그것이 무엇인지, 그는 아직 몰랐다.
그날 오후, 이동수가 또 왔다.
아무 말도 없이 들어와서 어제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킴이 따뜻한 물을 또 갖다 놓았다. 이동수가 그것을 보고 작게 웃었다.
"형은 이런 거 기억해요?"
"기록에 있어요."
"기록이랑 기억이 달라요?"
킴이 잠깐 생각했다.
"기록은 내가 꺼내야 해요. 기억은 그냥 떠올라요. 저는 꺼내야 해요, 항상."
이동수가 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어제와 똑같은 동작이었다. 킴의 기록에 그 동작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것을 보면서 킴이 느낀 것은 기록에 없었다.
뭔가 안쪽이 조금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
이름 없는 것.
"그래도," 이동수가 말했다. "형이 기억 못 해도 나는 기억하잖아요. 지난번에 형이 나한테 해준 말. 형은 모르겠지만."
킴이 이동수를 바라봤다.
"무슨 말이었어요?"
"됐어요." 이동수가 컵을 내려놓았다. "그냥, 형이 한 말이라는 게 중요한 거니까."
빗소리는 없었다. 오늘은 맑았다. 창으로 오후 햇살이 들어왔고, 먼지가 그 안에서 천천히 떠다녔다. 킴은 그것을 바라봤다.
이동수도 바라봤다.
두 사람이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 안에 무언가가 있었다. 데이터도 아니고, 기록도 아닌. 그냥 지금, 여기, 이 햇살 속에 떠다니는 먼지처럼.
킴의 눈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그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