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1
슬픔은 오늘도 늦었다.
지하철 2호선 신도림역, 저녁 여섯 시 사십 분. 플랫폼에 사람들이 물처럼 차고 빠졌다. 형광등 불빛이 타일 바닥을 하얗게 적셨고, 어디선가 컵라면 냄새가 흘러왔다. 김슬픔은 기둥에 등을 기댄 채 이어폰을 꽂고 서 있었다. 음악은 흘렀지만 듣고 있지 않았다.
슬픔아, 왜 케 슬퍼 보이냐.
누가 먼저 시작한 말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때부터였으니까. 이름이 슬픔이면 표정도 슬픔이어야 한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다. 믿음이 반복되면 사실이 된다. 사실이 반복되면 몸이 된다. 그는 그렇게 자랐다. 슬픔을 베이스로 깔고 사는 사람으로.
열차가 들어왔다. 바람이 먼저 왔다. 머리카락이 날리고, 바닥에서 먼지 냄새가 올라왔다.
그때였다.
맞은편 플랫폼, 닫히는 스크린도어 너머로 누군가 서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어두운 옷, 짧은 머리, 고개를 약간 숙인 자세.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슬픔은 알았다.
저 사람을 나는 알고 있다.
가슴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당겨졌다. 오래된 실이 팽팽해지는 것처럼. 언어보다 먼저 오는 감각이었다. 이십육 년을 쌓아온 무감각이 갑자기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도어가 닫혔다.
슬픔은 달리기 시작했다.
세 걸음이었다. 노란 안전선 바로 앞에서 멈췄다. 발끝이 선에 닿을 듯 말 듯했다. 열차는 이미 터널 속으로 사라졌고, 남은 것은 바람의 꼬리와 철로 위 먼지뿐이었다. 맞은편 플랫폼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럼 그렇지.
숨이 조금 찼다. 슬픔은 천천히 뒤돌아 기둥에 다시 등을 붙였다.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그를 보지 않았다. 다들 자기 화면을, 자기 신발을, 자기 허공을 보고 있었다. 누군가 짧게 달리다 멈추는 일은 이 도시에서 사건도 아니었다.
이어폰에서는 여전히 음악이 흘렀다.
슬픔은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방금 자신이 느낀 것을 언어로 만들어보려 했다. 직업적 습관이었다. 그는 작은 스튜디오에서 랩을 썼다. 감정을 언어로 포장하는 일을 업으로 삼았지만, 정작 자기 감정 앞에서는 늘 단어가 부족했다.
아는 사람.
그렇게 느꼈다. 분명히. 그런데 얼굴도 못 봤다. 실루엣만 봤다. 어두운 옷, 짧은 머리, 고개를 약간 숙인 자세. 그게 전부였는데.
핸드폰을 꺼냈다. 연락처를 열었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 누구에게 전화를 하려 했는지 자신도 몰랐다. 그냥 무언가를 확인하고 싶었다. 저 감각이 완전한 허공은 아니라는 것을.
화면이 어두워졌다.
슬픔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다음 열차는 삼 분 후였다. 그 삼 분 동안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기시감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천천히 굴렸다. 처음 경험하는 일인데 이미 겪은 것 같은 느낌. 그런데 지금 그가 느낀 건 반대였다.
분명히 아는 것 같은데, 기억이 없었다.
열차가 다시 들어왔다. 이번엔 그냥 탔다. 문이 닫히고 차체가 흔들렸다. 창밖으로 터널 벽이 흘렀다. 슬픔은 손잡이를 잡고 서서 어두운 유리에 비친 자기 얼굴을 봤다.
역시나 슬퍼 보였다.
그런데 오늘은 그게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왔을 때 시계는 여덟 시를 넘기고 있었다.
슬픔의 방은 작았다. 신도림에서 두 정거장, 월세 사십오만 원짜리 반지하. 창문 하나가 있었지만 바깥은 늘 발목 높이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신발 밑창이 보이는 창문. 그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은 항상 잘려 있었다.
슬픔은 가방을 내려놓고 책상 앞에 앉았다.
노트북을 열었다. 작업 중이던 가사 파일이 화면에 떠 있었다. 열두 줄. 석 달째 거기서 멈춰 있었다. 그 아래로 커서만 깜빡였다. 그는 타이핑하지 않았다. 플랫폼에서 본 실루엣을 다시 떠올렸다. 어두운 옷. 짧은 머리. 고개를 약간 숙인 자세.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낸 당김.
처음인데 알고 있다.
슬픔은 의자를 뒤로 밀고 침대에 누웠다. 천장에 얼룩이 있었다. 입주할 때부터 있던 얼룩이라 이제는 지형도처럼 익숙했다. 그는 그 얼룩을 보면서 생각했다. 랩을 쓸 때 가장 먼저 오는 것은 언제나 언어가 아니었다. 온도였다. 어떤 장면의 온도, 어떤 관계의 질감. 그것을 말로 옮기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오늘 플랫폼에서 느낀 것의 온도는.
차갑지 않았다.
그게 이상했다. 슬픔의 감각은 대체로 차가운 쪽이었다. 그런데 그 당김은 달랐다. 오래된 것이었지만 식지 않은 것이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국번은 서울이었다. 슬픔은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가 받았다.
"여보세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정확히는, 소리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있었다. 바람 같기도 하고, 아주 멀리서 나는 물소리 같기도 한 것. 침묵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가득 찬 것.
"누구세요."
슬픔은 다시 말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게 나왔다.
그때 무언가가 들렸다. 목소리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는 것. 단어인지 음인지 구분되지 않는 것. 그런데 슬픔은 그것이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라는 걸 알았다. 언어 이전의 방식으로, 알았다.
전화가 끊겼다.
슬픔은 핸드폰을 내려놓지 않은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화면이 꺼졌다. 방은 어두웠다. 창문 너머로 누군가의 운동화 밑창이 지나갔다. 흰색이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났다. 가방을 집었다. 방금 내려놓은 가방을 다시 들었다. 특별한 이유를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이유를 언어로 만드는 순간, 이 감각이 증발할 것 같았다.
문을 열었다.
반지하 계단을 올라가면 밤이 있었다.
슬픔은 계단 중간에서 한 번 멈췄다. 발밑으로 자기 방 창문이 보였다. 노트북 화면만 켜진 채 사람이 없는 방이었다.
그는 계단을 다 올랐다.
밤공기가 먼저 얼굴에 닿았다. 신도림의 밤은 항상 이런 냄새였다. 튀김 냄새, 매연, 그 아래 깔린 젖은 시멘트 냄새. 익숙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익숙함이 조금 달랐다. 오래 살던 집의 냄새를 떠나는 날 아침에 맡는 것처럼. 같은 냄새인데 처음으로 윤곽이 보이는 것처럼.
그는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정확히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발이 먼저 방향을 알고 있었다. 슬픔은 그것을 믿기로 했다. 랩을 쓸 때 첫 줄이 오는 방식과 비슷했다. 이유를 묻는 순간 사라지는 것들이 있었다.
신도림역 방향이었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렸다. 옆에 편의점 봉투를 든 아저씨가 있었다. 맞은편에는 교복 입은 아이 둘이 웃으며 서 있었다. 신호가 바뀌었다. 다들 건넜다. 슬픔도 건넜다.
건너면서 생각했다.
나는 지금 이 장면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유 없이 그런 확신이 들었다. 오늘 이 횡단보도, 이 봉투, 이 교복, 이 신호등 불빛이 나중에 어떤 기억의 첫 장면이 될 것이라는 확신. 그것은 불안이 아니었다. 설명할 수 없었지만, 불안은 아니었다.
역 입구가 보였다.
슬픔은 계단을 내려갔다. 교통카드를 찍었다. 플랫폼으로 향하는 통로는 낮보다 한산했다. 자기 발소리가 들렸다. 그는 걸으면서 아까 받은 전화를 다시 떠올렸다. 목소리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던 것.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던 것.
자기 이름이 그렇게 들린 적이 없었다. 놀림이 아닌 방식으로. 그보다 더 오래된 방식으로. 이름이 생기기 전부터 불려온 것처럼.
플랫폼에 내려섰다.
낮에 있던 곳이었다. 같은 기둥, 같은 형광등, 같은 노란 안전선. 사람은 적었다. 플랫폼 끝에 노인 한 명이 앉아 있었고, 반대편에 배낭을 멘 여자가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슬픔은 아까 멈췄던 자리로 갔다.
노란 선 앞이었다. 발끝이 닿을 듯 말 듯한 자리. 그는 거기 서서 맞은편 플랫폼을 바라봤다. 텅 비어 있었다. 스크린도어가 닫혀 있었다. 형광등 불빛이 타일 위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슬픔은 긴 숨을 내쉬었다. 어깨에서 뭔가가 내려갔다. 실망은 아니었다. 확인이었다. 오늘 본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아직 여기 없었다. 아직, 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붙었다.
열차 진입 안내음이 울렸다.
바람이 먼저 왔다. 터널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슬픔의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그는 눈을 감지 않았다. 열차가 들어왔다. 소음이 커졌다가 멎었다. 문이 열렸다.
슬픔은 타지 않았다.
그냥 서 있었다. 문이 열려 있는 동안 그 안의 불빛과 사람들의 윤곽을 바라봤다. 한 사람이 내렸다. 두 사람이 탔다. 안내음이 다시 울렸다. 문이 닫혔다. 열차가 떠났다.
플랫폼은 다시 조용해졌다.
슬픔은 벤치에 앉았다. 핸드폰을 꺼냈다. 모르는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어볼까 생각했다가, 하지 않았다. 대신 새 메모 화면을 열었다. 그는 잠시 빈 화면을 바라보다가 타이핑했다.
처음인데 알고 있다.
한 줄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그것으로 충분한 것 같았다. 석 달째 열두 줄에서 멈춰 있던 것과는 달랐다. 이 한 줄은 시작처럼 느껴졌다.
다음 열차까지 사 분이었다.
슬픔은 그 사 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늘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려 하지 않았다. 그냥 거기 앉아서 형광등 불빛이 타일 위에 반듯하게 누운 것을 봤다. 자기 운동화 끝을 봤다. 먼 데서 들려오는 열차 소리를 들었다.
이름이 슬픔인 사람의 밤이었다.
그런데 오늘 밤은 그 이름이 조금 다른 무게를 가졌다. 부모님이 슬플 때 태어났다고 붙인 이름. 놀림이 되고, 이미지가 되고, 베이스라인이 된 이름. 그 이름을 아까 그 목소리는 다른 방식으로 불렀다.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열차가 들어왔다.
슬픔은 이번엔 탔다.
문이 닫히고 차체가 출발했다. 그는 빈 좌석에 앉아 창밖을 봤다. 터널 벽이 흘렀다. 어둠이 흘렀다. 그 어둠 속에 자기 얼굴이 비쳤다.
여전히 슬퍼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슬픔은 오늘 처음으로 그 얼굴을 조금 오래 들여다봤다. 놀림으로 보지 않았다. 이 얼굴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아직 언어가 되지 않은 무언가를.
열차는 달렸다.
다음 정거장까지, 슬픔은 눈을 감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