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1
알람이 울리기 전에 유진은 이미 깨어 있었다.
눈을 뜨는 순간 꿈의 끄트머리가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빠져나갔다. 불,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 한국어가 아니었다. 아니, 한국어이기는 했는데 지금 쓰는 말이 아니었다. 오래된 말. 입천장에 닿는 자음들의 질감이 달랐다.
7시 14분. 오늘도 알람보다 먼저였다.
유진은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나 앉았다. 관악구 봉천동, 원룸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은 흐렸다. 3월의 서울이 늘 그렇듯이. 미세먼지 나쁨. 핸드폰 화면이 주황색 경보를 띄우고 있었다.
싱크대에서 물을 틀었다. 찬물이 손목을 때렸다. 그 감촉에 꿈이 한 조각 더 돌아왔다. 물가. 강이 아니라 바다도 아닌, 폭이 좁고 빠른 무언가. 여자가 서 있었다. 유진 자신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얼굴이 없었다. 아니, 얼굴은 있었는데 볼 수가 없었다.
"또."
유진은 혼자 말하고 수도꼭지를 잠갔다.
편의점 알바는 9시 시작이었다. 유진은 8시 45분에 도착하는 습관이 있었다. 점장 오 씨는 그 점을 좋아했고, 유진은 그 점장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15분의 여유를 포기할 생각도 없었다.
출근길 골목에서 할머니 한 분이 박스를 끌고 있었다. 유진은 멈췄다.
"제가 들어드릴까요."
할머니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탁했다. 백내장인지 아니면 그냥 아침빛 때문인지.
"괜찮아. 나 오래 했어, 이거."
유진은 잠깐 서 있다가 걸음을 옮겼다. 세 걸음쯤 갔을 때 할머니가 말했다.
"아가씨, 꿈 잘 꿔?"
유진이 돌아봤다. 할머니는 박스를 끌고 있었다. 유진 쪽을 보지 않고.
"네?"
"꿈. 요즘 꿈이 많으면 몸이 신호 보내는 거야. 옛날 어른들은 그랬어."
유진은 뭔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할머니는 이미 골목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고 있었다.
편의점 유리문에 자기 얼굴이 비쳤다. 박유진, 스물아홉. 피곤하게 생겼다. 머리카락이 귀 뒤로 넘어가 있었다. 언제 넘겼는지 기억이 없었다.
오전 타임은 조용했다. 학생 둘, 배달 기사 하나, 출근하는 직장인들 몇 명. 바코드 찍고 봉투 드리고 거스름돈 주고. 유진은 동작을 반복하면서 꿈을 다시 짜맞추려 했다. 퍼즐처럼. 불. 목소리. 물가의 여자. 그리고 또 뭔가가 있었는데.
"아메리카노 따뜻한 거요."
"네, 잠시만요."
컵에 커피를 담으면서 기억났다. 인장. 도장 같은 것. 붉은색. 누군가의 손바닥에 찍혀 있었다. 아니면 새겨져 있었다. 타들어간 것처럼.
유진은 커피를 건네다가 뚜껑을 제대로 닫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손님이 가고 나서 카운터를 닦으며 속으로 욕을 했다. 자신한테.
집중해.
점심시간에 유진은 편의점 뒤 계단에 앉아 삼각김밥을 먹었다. 참치마요. 이 동네에서 5년을 살았는데 먹는 것도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대학 졸업하고 취업 준비하다 알바 시작했고, 취업 준비는 어느 순간 그냥 멈췄다. 멈춘 시점을 정확히 말하기가 어려웠다. 서서히였다.
핸드폰에 카카오톡이 떴다. 대학 동기 정수가 보낸 메시지.
야 이번 주말에 강남 나와? 모임 있어.
유진은 읽고 화면을 뒤집어 놓았다. 나중에 답하면 됐다. 아니면 안 해도 됐다. 정수는 이해할 것이다. 정수는 늘 이해했다. 그게 때로 더 힘들었다.
바람이 불었다. 3월 바람은 아직 이가 있었다. 유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꿈속의 목소리가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명령이었다. 명령인데 뭔지를 모르겠다. 깨고 나면 항상 그랬다. 내용 없는 긴박함. 의미 없는 절박함. 그게 3주 전부터 이어지고 있었다.
처음엔 일주일에 한 번이었다. 지금은 매일이었다.
퇴근은 5시였다. 유진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서점에 들렀다. 특별히 살 게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서점은 따뜻했고 종이 냄새가 났다. 그것만으로 충분할 때가 있었다.
역사 코너를 지나다가 멈췄다.
표지에 인장이 있었다.
붉은 인장. 꿈속에서 본 것과 완전히 같다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비슷했다. 원형에 새겨진 문자들, 그 배열 방식.
책 제목은 조선의 무녀: 국가와 신탁 사이에서였다.
유진은 책을 집어 들었다. 펼치지 않았다. 그냥 표지를 보고 있었다. 인장을 보고 있었다. 계산대 직원이 힐끗 쳐다봤다가 시선을 거뒀다.
유진은 책을 샀다.
집에 돌아와 코트를 걸고 신발을 벗는데 손이 약간 떨렸다. 떨린다는 걸 인식하고 나서야 알았다. 추워서인지 다른 이유인지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
책을 책상 위에 놓았다. 인장이 위를 향하게.
유진은 의자에 앉아서 책을 펴지 않은 채 한동안 그것을 봤다. 창밖에서 오후의 서울이 소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차 지나가는 소리, 어디선가 공사 소리, 아이들 소리.
그러다가 책을 펼쳤다.
첫 페이지에 인용구가 있었다.
신탁을 받은 자는 선택하지 않는다. 다만 응답할 뿐이다.
출처는 없었다. 저자 주석에는 '작자 미상, 구전'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유진은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그날 밤 꿈은 전날보다 선명했다. 불이 더 컸다. 목소리가 더 가까웠다. 물가의 여자가 이번엔 유진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유진은 보기 직전에 깼다.
4시 53분.
창밖은 아직 어두웠다. 유진은 이불 위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꿈이 남긴 것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보다 이상한 것이었다.
기다려왔던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