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1
박정진은 오늘도 지하철 2호선을 탔다.
창가 자리에 앉아 유리에 이마를 기댔다. 바깥으로 터널 벽이 흘러갔다. 콘크리트 얼룩, 낡은 케이블, 이따금 번지는 형광등 빛.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속도로 지나쳤다.
이어폰 한쪽은 귀에, 한쪽은 무릎 위에 늘어져 있었다. 음악은 꺼져 있었다. 그는 소리를 듣는 것보다 소리가 없다는 사실을 좋아했다. 지하철 소음은 달랐다. 그건 침묵의 일종이었다. 사람들의 숨소리, 핸드폰 진동, 바퀴와 레일이 마찰하는 낮고 규칙적인 울림. 그 안에 있으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됐다.
을지로3가에서 내렸다. 늘 그랬듯이.
사무실은 을지로 골목 안쪽, 낡은 건물 4층에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없었고, 계단은 삐걱거렸다. 3층 문 앞에 붙어 있는 스티커—누군가 오래전에 붙여놓은 빨간 고양이—를 지날 때마다 박정진은 눈길을 주지 않으려 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눈이 갔다. 이유는 몰랐다.
"왔어요?"
안에서 소 대리가 고개를 들었다. 소 대리는 항상 제일 먼저 출근해 있었다. 마흔 살인데 얼굴이 서른처럼 보였다. 그 이유를 박정진은 한 번도 묻지 않았다.
"네."
"어제 작업한 거 확인해봤어요? 수정 들어왔어요."
"얼마나요?"
"많지는 않아요. 연도 두 개 틀렸대요."
박정진은 코트를 벗으며 자리에 앉았다. 모니터를 켰다. 화면이 들어오는 동안 잠깐 눈을 감았다. 형광등 소리가 들렸다. 이 사무실 형광등은 언제나 미세하게 웅웅거렸다. 처음 왔을 때는 신경 쓰였는데, 지금은 그것마저 침묵의 일부였다.
그는 역사 기록 정리 대행 회사에 다녔다. 정식 명칭은 '기록문화연구소 아카이브팀'이었지만, 하는 일은 단순했다. 각종 기관과 지자체가 의뢰한 문서들을 읽고, 연대를 정리하고, 오탈자를 고치고, 표를 만들었다. 역사라는 말이 붙어 있었지만 역사적인 느낌은 별로 없었다. 그냥 숫자와 이름과 날짜였다.
그는 그게 좋았다. 숫자는 틀리거나 맞거나 둘 중 하나였다.
점심은 혼자 먹었다. 아래층 국밥집에서 순대국을 시켰다. 반찬은 깍두기와 파김치. 국물이 뜨거웠다. 숟가락으로 한 번 저은 뒤 그냥 마셨다. 혀 끝이 살짝 데었다.
맞은편 벽에 달력이 걸려 있었다. 3월. 달력 그림은 경복궁이었다. 광화문 앞에 눈이 쌓인 사진. 박정진은 숟가락을 들다 말고 그 사진을 잠시 바라봤다.
경복궁에 마지막으로 간 게 언제였더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갔었는지도 불분명했다. 어린 시절 소풍으로 갔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그냥 사진에서만 본 것일 수도 있었다. 그 둘을 구분할 수 없었다. 기억이라는 게 원래 그런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특별히 잘 잊는 편인지도 몰랐다.
국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뜨거웠다. 이번에도.
오후에는 조선시대 지방 관아 문서를 정리했다. 1780년대 전라도 어느 현의 세금 기록이었다. 쌀 몇 섬, 베 몇 필, 누가 냈고 누가 못 냈고. 이름들이 줄줄이 나왔다. 박 아무개, 김 아무개, 이 아무개. 다들 죽은 지 이백 년이 넘은 사람들이었다.
박정진은 이름을 입력하다가 잠깐 손을 멈췄다.
박 덕봉. 열여섯 살. 납부 불가. 이유: 부친 사망.
그 한 줄이 이상하게 오래 눈에 걸렸다. 열여섯에 아버지를 잃고, 세금 낼 형편이 안 됐다는 사실이 이백 년 뒤에 엑셀 셀 하나에 들어갔다. 박 덕봉은 그 이후 어떻게 됐을까. 기록에는 없었다. 다음 해 세금 명부에 이름이 있으면 살아남은 것이고, 없으면 이사를 갔거나 죽었거나 그냥 기록에서 빠진 것이었다.
박정진은 다음 시트를 열었다. 1781년 명부. 박 덕봉. 없었다.
그는 잠시 빈 셀을 바라봤다가, 다음 이름을 입력했다.
퇴근길에 비가 내렸다. 예보에 없던 비였다. 우산이 없었다. 을지로 골목 처마 밑에 잠깐 서서 하늘을 봤다. 낮은 구름이 빠르게 흘렀다. 가로등 불빛이 물에 번졌다.
비가 세지 않아서 그냥 걸었다. 코트 어깨가 젖었다. 머리카락 끝에 물방울이 맺혔다.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면서 박정진은 오늘 하루를 떠올려봤다. 국밥. 달력의 경복궁. 박 덕봉. 을지로 처마. 그게 전부였다. 별 것 없는 하루였다. 어제도 별 것 없었고, 내일도 아마 별 것 없을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그게 나쁘지 않았다.
플랫폼에 서서 전광판을 봤다. 2분 후 도착. 레일에서 바람이 올라왔다. 터널 냄새. 쇠와 먼지와 오래된 공기의 냄새. 박정진은 그 냄새를 들이마시며 눈을 감았다.
뭔가가 코끝에 걸렸다. 냄새가 아니었다. 감각이었다. 아주 오래된 것의 감각. 어디선가 맡아본 것 같은, 아니면 어디선가 맡아본 것을 기억하는 것 같은.
그는 눈을 떴다. 전동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불빛이 터널 안쪽에서 번졌다.
생각은 사라졌다.
지하철이 멈췄고, 문이 열렸고, 그는 탔다.
집은 을지로에서 세 정거장이었다. 방 하나짜리 원룸. 현관에 들어서며 코트를 걸었다. 불을 켰다. 작은 책상, 낡은 소파, 창문 너머로 보이는 옆 건물 외벽. 늘 그대로였다.
냉장고를 열었다. 달걀 두 개, 두부 반 모, 맥주 한 캔. 달걀을 꺼냈다.
프라이팬을 올리고 기름을 둘렀다. 달걀이 지글거리기 시작했다. 흰자가 천천히 굳어갔다. 박정진은 그걸 바라보며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었다. 부엌에서 이 냄새가 나면 하루가 끝난다는 걸 그는 몸으로 알고 있었다.
달걀을 접시에 담았다. 소파에 앉아 먹었다. 텔레비전은 켜지 않았다.
창밖으로 빗소리가 들렸다. 아까보다 조금 굵어진 것 같았다. 옆 건물 외벽에 빗줄기가 흘렀다. 박정진은 그걸 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내가 뭘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생각이 왔다가 그냥 갔다. 잡으려 하지 않았다.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드는 날이 가끔 있었다. 뭔가 빠뜨린 것 같은 느낌. 하지만 뭘 잊었는지는 모르는 느낌. 잊었다는 사실을 잊은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인지.
빈 접시를 싱크대에 놓았다. 이를 닦았다. 불을 껐다.
침대에 누웠다.
창밖의 빗소리는 계속됐다. 규칙적이고 낮고, 지하철 소음과 조금 비슷했다.
박정진은 눈을 감았다.
무언가가 잠 안쪽에 있었다. 이름도 없고 윤곽도 없는 것이. 그는 그쪽으로 가지 않았다. 가는 법을 몰랐다. 아니면 알았는데 잊었거나.
빗소리.
숨소리.
그리고 잠.